참 맑은 날 참 맑은 날 눈이 부시도록 맑은 날 *용마산이 가까이 다가와 산자락 배밭에는 주렁주렁 가을 햇빛 익어가고 솨아하하 나뭇잎들 밝은 웃음소리 시원하다 멀리 북한산의 능선과 산세도 손금을 보듯 또렷하고 도봉산 계곡 물소리도 차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우이동 고개 길을 깎는 신음소리 아프다 지.. 나무는 집을 짓지 않는다 2006.02.25
그 자리 그 자리 꼬질꼬질 때도 묻은 누비이불 아래 식을세라 밥 그릇 네 개 사이엔 눅진해진 호박엿 콩고물 묻혀 조물락조물락 저울로 단 듯 똑같이 나누어 주시던 할머니 설설 끓던 아랫목에 우리 네 남매 언 발 녹이며 나란히 누워 있으면 매서운 겨울바람조차 얼씬 못하던 그 자리 도란도란 밤은 깊어 보따.. 나무는 집을 짓지 않는다 2006.02.25
귀걸이 귀걸이 귀걸이 하나 달고 싶네 소슬한 바람에도 가볍게 흔들려서 맑은 소리 귀에 쟁쟁한 곱게 화장도 하고 싶네 세월의 이끼 머리에 하얗게 내리고 얼굴에 주름 감추지 못해도 붉은 노을 잔잔히 번지는 저무는 가을날 고요한 저 석탑처럼 천 년이라도 기다리겠네 아름다운 사람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 나무는 집을 짓지 않는다 2006.02.25
방바닥을 닦다가 방바닥을 닦다가 빗자루로 구석구석 쓸고 나서 엎드려 다시 걸레질을 한다 무릎은 발갛게 까져 버렸고 허리도 끊어질 듯 아프다 끝없는 참회의 기도처럼 닦아도 닦아도 또 나오는 먼지와 머리카락 하루를 살면서 남긴 것들이 덧없고 쓸쓸한 것뿐이구나 이마에 흐른 땀을 훔치며 먼지와 머리카락 버리.. 나무는 집을 짓지 않는다 2006.02.25
땅끝에서 땅끝에서 길이 멈추어 버린 곳 땅끝 벼랑 위에 서다 바람도 길 잃고 서성이는 저무는 겨울 바다 파도는 끊임없이 몰려와 벼랑에 울부짖다 떠나가는데 정작 찢어진 것은 끄떡없을 것 같던 벼랑 기나긴 세월 밤낮 없이 파도에 깎이고 멍이 들어 이 밤도 어둠 속 아들의 땅끝 지키시는 늙으신 어머니의 벼.. 나무는 집을 짓지 않는다 2006.02.25
동백 동백 님을 그리워한 것이 죄라면 하얀 눈 소리없이 세상을 덮은 날 혼자 불타는 사랑 꽃피운 것이 죽을 죄라면 내 목을 드리우지요 망나니의 칼바람에 뎅겅 목이 떨어져도 사랑을 속일 수는 없어요 베어진 내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의 향기 바람에 날려 님을 불러온다면 흩뿌려진 나의 피가 꽃불 되어 .. 나무는 집을 짓지 않는다 2006.02.25
망우리 *망우리(忘憂里) 잊겠네 서러운 세상 슬픈 사랑쯤은 다 잊겠네 포근한 땅 속 깊이 잠들어 햇살 눈 부신 어느 봄 날 풀꽃으로 피면 그리움마저 먼 강물인 듯 아주 잊겠네 ============ *망우리: 서울 중랑구 망우동. 용마산 위에는 망우리 공동 묘지가 있고 망우리 고개를 넘으면 조선 태조의 임금이 있는 동.. 나무는 집을 짓지 않는다 2006.02.25
테니스 사랑 테니스 사랑 사랑이란 나의 중심으로 너를 받아들이는 것 나의 온 몸으로 너에게 반응하는 것 너와 나 사이 멀리 떨어져 있고 높은 장벽 있어도 너만을 바라보며 기쁘게 넘어가는 것 너에게 갈 때는 경쾌한 타구음같이 즐거운 환호성 올리며 새처럼 총알처럼 전력으로 달려가는 것 나무는 집을 짓지 않는다 2006.02.25
영정 영정 고향에 가신 것일까 웃으시는 할아버지 누더기처럼 병든 몸 실향의 슬픔 벗어서 다 태워버리고 액자 저 편에서 홀가분히 웃고 계신다 환하구나 죽어서야 찾은 할아버지의 *본래 면목 *본래면목: 불교에서, 중생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을 이르는 말 2002. 9. 11 行雲 나무는 집을 짓지 않는다 2006.02.25
정주(定州) 정주(定州) 소나무들도 파랗게 얼어 서 있는 공원 묘지 한쪽 구석 아버지의 비석을 닦다가 흐려진 눈에 성큼 들어온 음각자(陰刻字) 평안북도 정주 고집스럽게도 달고 계셨구나 돌아가신 지 어언 40년 이국 땅에 외톨이로 걸린 한글 문패처럼 쓸쓸히 닳아져 가는 아버지의 고향 낯선 피난지 부산에 청상.. 나무는 집을 짓지 않는다 2006.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