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모음 37

지킬 박사와 하이드

짝퉁론/ 지킬 박사와 하이드 우리 동네 새 면장의 별명은 지킬 박사다 아는 것은 별로 없는데 말할 때마다 법과 원칙을 지킬 것이고 주민과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며 대단한 법치주의자 행세를 해서 별명이 지킬 박사가 되었지만 정작 자신은 법도 원칙도 안 지킨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하이드다 인품이나 언행이 이건 완전 개차반 뭔가 수상한 구석이 많은 데다 숨기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의 군 면제 사유도 수상하며 이력이나 재산, 가족 관계 등 의심스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모든 것이 철저하게 하이드다 우스운 건 그가 자주 가는 룸싸롱이 하이드 싸롱이라는데 지금의 부인도 거기서 만났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지킬 박사로만 알고 우리의 면장으로 뽑았지만 뽑아놓고 보니 면장도 뭘..

신작시 모음 2022.07.30

사랑은

사랑은/ 강승남 가슴이 아파지는 것 나를 잊게 되는 것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 라면만 같이 먹어도 좋고 마라탕도 함께 먹을 수 있는 것 바보처럼 웃게 만들며 사는 날 동안 간직할 기쁨 아무도 모르는 슬픔 자신만이 간직한 비밀 차가운 겨울길도 함께라면 춥지 않네 카페에 마주 앉으면 말없어도 좋으리 타인으로 만나 서로의 자기 되어 파뿌리처럼 머리 다 희어지도록 하나가 되어 함께 늙어가고 싶은 것

신작시 모음 2022.01.18

어처구니없이 살 일이다

어처구니없이 살 일이다/ 강승남 어떤 이는 맷돌에 손잡이가 없어서 어처구니가 없다고 하고 어떤 이는 궁궐의 잡상을 안 올려서 어처구니가 없다고 하는데 또 어떤 이는 이 나라 정치가 혹은 사회가 예술이 종교가 배웠다는 사람들이 있는 것들이 젊은 놈들이 아주 어처구니없다고들 말하는데 이 나이 되어보니 알겠다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 세상을 사는 일 그 자체 덧없는 세월 속절없이 흘러서 한 평생 열심히 살아온 일이 이슬이 사라지듯 구름이 흩어지듯 아무것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러니 삶이란 것은 어처구니가 있는 듯 살 것 아니라 어처구니없는 듯 살 일이다 어처구니가 어디 있냐고 왜 어처구니가 없냐고 아등바등 눈에 불켤 게 아니라 삶이란 본래부터 어처구니없으니 저 하늘 구름처럼..

신작시 모음 2021.05.28

증인

증인 / 강승남 사십여 년이 지나서 그가 광주를 찾아 유족과 영령들 앞에 무릎 꿇고 사과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진압군 지휘관이었던 그가 칠순의 노인이 되어 사과하러 온 것이다 사십여 년의 세월을 넘어선 사과와 용서와 화해의 자리, 그 무덤 앞이 눈부시게 환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지휘관들도 이제는 진실을 말해달라고 호소했다 영화 [증인]의 자폐아역 김향기는 말했다 변호인은 못 해도 증인은 할 수 있습니다 증인은 남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끝부분에서 변호인 역 정우성이 모든 것을 버리고 증인으로 나섰을 때 김향기의 참 향기롭던 대사, 아저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섣부른 변호나 어설픈 변명이 아닌 진실한 증언만이 남과 세상을 도울 뿐 아니라 자신도 구원하게 되리라 아직도 망설이고 두려워하는..

신작시 모음 2021.05.28

正刻

正刻 / 강승남 고단하고 덧없는 하루가 끝나갈 때 그곳에 정각이 있다 정각에 이르러 우리는 남루한 지난 날을 반납하고 다시 새로운 하루를 지급 받는다 세상의 모든 끝에도 정각이 있다 슬픔뿐인 삶일지라도 아픔뿐인 사랑일지라도 마침내 정각을 지나고 나면 새 날이 된다 새 땅이 된다 새 사람이 된다 새롭게 일어서는 삶이 있다 힘들어 울고 있는 그대여 조금만 더 힘내어 정각으로 가자 그곳에서 갈아입을 깨끗한 새 옷과 따뜻한 밥상 차려놓고 종일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 있으니

신작시 모음 2021.05.28

오래된 생각 ㅡ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리며

오래된 생각 /강승남 ㅡ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리며 ​ 사람이 지나가네 산 아래 사람이 지나가네 ​ 그리운 사람 하나 서러운 세상 길 지나가네 ​ 꽃잎처럼 지나가네 바람처럼 지나가네 ​ 산 아래 마을 살며 사람들을 좋아하던 사람 ​ 가난한 사람들 가슴에 한 줄기 봄바람이던 사람 ​ 사람 사는 세상이 오래도록 쓸쓸하겠네 꽃잎 떨어지면 가슴이 먼저 시리겠네 ​ 사람이 지나가네 사람들이 지나가네 ​ 사람 사는 세상으로 살아있는 자들 다 지나가네 ㅡㅡㅡㅡㅡㅡ *'오래된 생각', 와 '사람이 지나가네'라는 구절은 노 전 대통령이 남긴 말에서 따옴.

신작시 모음 2021.05.23

어처구니를 찾습니다

어처구니를 찾습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동방예의지국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절에 빛나던 등불 코리아 넉넉하지는 않아도 인정 많은 사람들 평화롭게 살아가던 우리 옛적은 사람마다, 집집마다, 동네마다 어처구니 하나씩은 갖추고 살았더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롭던 이 땅에 전쟁의 피바람 불고 저 무도한 왜놈들에게 나라 뺏기고 다시 찾은 나라 두 동강 나더니 사람들 마음 사나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젊은이가 늙은이에게 삿대질하고 자식이 부모를 핍박하고 매국노가 애국자를 잡아가두고 돈이 사람을 개패듯 패고 도둑놈이 법을 갖고 장난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온화하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쌍심지가 켜지고 게거품이 흘렀으며 심지어 네 발로 기며 물어뜯기까지 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괴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언제..

신작시 모음 2021.05.04

어처구니 나라

어처구니 나라/ 강승남 맷돌의 손잡이가 없어서 어처구니가 없다고 하니 그러면 맷돌 손잡이가 어처구니네 하더란다 맷돌 손잡이는 맷손이다 궁궐의 지붕에 잡상이 없어서 어처구니가 없다고 하니 그러면 궁궐의 잡상이 어처구니네 그러더란다 궁궐의 잡상은 그냥 잡상이다 그런데도 이 가짜 어처구니가 인터넷, 유투브, 신문 방송, 동화책, 아동용 학습서, 영화까지 어처구니없이 이 나라를 휩쓸고 다니며 시청률을 높이고 판매 수익을 올린다 화장실에 닦을 종이가 없어서 일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고 하면 아, 뒤닦는 종이가 어이네 그럴 건가, 바보야 뒤닦는 종이는 뒤지지 온통 가짜 어처구니들만 설쳐대니 가짜 뉴스가 진짜 행세를 하고 사이비 도서가 더 많이 팔리고 엉터리 영화가 아주 명작 행세를 한다 정치, 언론, 문화, 종교, ..

신작시 모음 2021.05.01

외국인 노동자 어처구니 씨

외국인 노동자 어처구니 씨 중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어처구니 씨 현재 하는 일은 궁궐 경비직 10명 내외가 한 팀이 되어 지붕 위에서 궁궐을 지키는 잡상 팀의 팀장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야 불문 교대없는 24 시간 근무 급여나 복지도 열악한 데다 심지어 차별과 억압에 시달려도 쫓겨날까 봐 불평 한 마디 못하는데 어쩌다 근무 들어갈 때 한 명만 늦거나 준비가 안 되어 있어도 나이도 어린 한국인 감독은 이 어처구니 없는 놈들, 아주 어이가 없네 쌍심지를 켜고 핏대를 올린다 그때부터 그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어처구니가 되었던 것이다 잡상 팀의 팀장인 어처구니 씨는 젊었을 때는 중국의 유명한 스님 밑에서 뛰어난 경호원으로 이름을 날리며 영화에도 여러 번 출연하였던 그 유명한 손오공 씨다. ㅡㅡㅡㅡㅡ 어처..

신작시 모음 2021.04.29

변절기

변절기/ 강승남 나무는 이제 완연한 가을 빛이다 여름 내내 뜨겁게 지켜 온 푸른 서슬 잃어버리고 *하룻밤 서릿김에 온통 노오랗게 물이 들었다 세상에, 변절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다니! 가을 빛 물든 거리가 차라리 눈이 부신데 이 아름다운 계절엔 나도 그만 나를 배반해도 되겠다 푸르던 날의 그리움 내려놓고 소슬한 가을 바람에 노오란 은행나무로 서 있어도 좋겠다 ============ *하룻밤 서릿김: 정철의 '사미인곡'에서

신작시 모음 2020.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