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집을 짓지 않는다

나 늙으면

行雲300 2006. 2. 25. 23:14
나 늙으면


무릎이 불편해서 4층 교실을 오르내리는 일이 힘들겠지만
머리 위 희끗희끗해진 반백의 머리가 눈부시리라
숱 많던 머리도 듬성듬성 빠져 버렸겠지만
필요 없는 정열을 버린 듯 차라리 홀가분하리라
익은 벼가 고개 숙이듯 어깨도 조금은 구부정하겠고
쭈글쭈글 주름은 졌어도 얼굴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하리라
나를 보고 형님 형님 하던 후배들이 교장이 되고 교감이 되어도
교실에 들어가는 일이 더 좋아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리라
때로는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이 속 상해서
이 노옴들 하고 화를 내면 아이들은 찔끔하겠지만
속으로는 하나도 안 무서운 그런 선생님이 되어 있으리라
늙어서도 나는 문학을 가르치는 일이 즐거워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아이들보다 내가 더 감동하고
황순원의 소나기를 가르칠 때는 사춘기처럼 가슴이 뛰리라
맞춤법 표준말 바른 문장 가르치기에 열을 올리면서도
그보다 더 아이들에게 하늘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부끄러움을 알고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잔소리에 시간을 더 보내는 할아버지가 되어 있으리라
이슬이 새벽같이 꽃을 찾아오듯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저녁 노을이 마지막 빛까지 다 주고 가듯이
늦게까지 남아 더듬더듬 아이들의 작문을 읽고 있으리라
수업이 없을 때는 면 장갑 끼고 복도의 껌을 떼고 있거나
화단을 가꾸며 꽃 하나 하나에 아이들 이름을 붙여 주리라
민들레는 씩씩한 대한이, 냉이꽃은 착한 민국이
개나리는 튼튼한 우리, 저기 진달래는 어여쁜 나라
젊은 후배들은 힘드실 텐데 쉬시라고 나를 걱정해도
파란 하늘 구름 한 번 보고 웃으며 나는 다시 흙을 만지리라
나의 지식과 인품 보잘것없지만 아이들에게 남김없이 베풀고
문득 사라질 조각구름처럼 두둥실 살아가리라
누군가 나에게 젊었을 때의 꿈을 묻는다면
옛날에도 지금도 아이들이 꿈이라고 말하리라
그러던 어느 날 교단을 물러나야 할 때가 되면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퇴임식장에 앉아 있으리라
퇴임식 끝난 후에도 다음 시간 수업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교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허둥대리라
평생을 평교사로 몸바친 교단을 물러난 후
아이들이 나를 오래 잊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보다도 내가 아이들을 더 오래 잊지 못하리라
나 늙으면 정오의 태양처럼 많은 사람 위에 내리쬐기보다
사람들 가슴에 오래오래 머무는 저녁 노을이 되리라
어두울수록 수많은 별빛 반짝이는 밤하늘처럼
나 늙으면 아름다운 기억 속에 고요히 저물어 가리라



2002. 8. 25 行雲

'나무는 집을 짓지 않는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헌 신  (0) 2006.02.25
옛날  (0) 2006.02.25
가을의 기도  (0) 2006.02.25
송전탑  (0) 2006.02.25
청소 시간  (0) 2006.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