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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저녁별처럼/ 강승남

行雲300 2009. 11. 5. 07:49

 

 

 

 저녁별처럼/ 강승남


가난하던 어린 날엔 궁금한 것도 많았지

 

꽃들은 왜 피었다 지는지

가을밤엔 기러기들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나는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 ......

 

어두워진 후에야 어렴풋이 알겠네

 

모든 것들은 다만 이 세상이 궁금해서 왔다가

또한 저 세상이 궁금해서 가는 것

 

마음을 지닌 것들은 본래가 궁금한 것임을


- 시집 <저녁별처럼> 2009, 현대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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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 잘하는 아이의 특징은 대체로 호기심이 왕성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은 물론이고 눈에 뵈는 모든 현상이 궁금하여 그 원인을 알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주위의 누구에게라도 묻고 책도 뒤져보는 것인데, 이런 탐색이 자주 차단당하면 점점 자신감을 잃게 된다. 한번 자신감을 잃으면 자칫 소극적인 성격으로 변해 혼자서 빙빙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진전도 없는 공상이나 하다마는 것이다.

 

 내 어린 날도 궁금한 것은 태산처럼 많았겠다. 하지만 그 궁금증을 해소시켜줄 마땅한 방도는 없었고 아버지는 지근거리에 있지 않았다. 책도 별로 없었다. 의문은 줄지 않았으나 질문은 줄었다. 아니 사라졌다. ‘꽃들은 왜 피었다 지는지, 가을밤엔 기러기들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이런 의문은 리틀 셰익스피어 풍의 고급스런 궁금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만날 ‘나는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식의 근원적으로 피곤한 의문에만 묶여있었고 시달렸다.  

 

 풀리는 의문도 없었고 풀려야할 궁금증도 없었다. 아무런 진전이 없었으나 다만 아이가 여자의 어느 신체부위에서 나오는가는 초등 5학년 무렵 파악 했던 것 같다. 그것도 아이의 생성과정은 여전히 미궁인 채. 그리고 달은 왜 모양을 바꾸는지, 왜 파란색의 진달래는 없는지 따위는 내 호기심 사전에서 사라졌다. 어쩌다 마당에 쭈그려있으면 내 보기엔 쓸데없이 분주한 개미들의 삶이 궁금하여 그들의 보금자리를 후벼 파본 일은 있었다. 하지만 공부 못하는 평범한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내 호기심의 방향은 늘 ‘여자 아이의 치마 속에는 무슨 비밀이 있을까’ ‘선생님도 우리와 꼭 같은 폼으로 용변을 보는 걸까’ 그런 쪽이었다.  

 

 조금 더 자라서는 ‘내 초가 빨리 타는 것은 지은 죄가 많아서일까’와 같은 회의도 없지 않았으나 내 탄생의 연유와 내 가야할 저 세상에 대한 궁금증만 여전했다. 다만 어른이 되어 나 역시 궁금했던 몇 가지는 대중영화가 일깨워주기도 했다. 이를테면 ‘별들의 고향’에서 경아가 문호에게 누운 자세에서 ‘남자는 젖꼭지가 왜 있는 거지’라고 물었던 것이나 일본 소설을 영화한 ‘실낙원’에서 여자가 역시 누운 자세로 남자에게 물었던 ‘정말 궁금한 것이 있는데, 남자가 여자에게서 느끼는 성감의 정도란 건 모두 그게 그것 아니냐고’ 따위.

 

 아, ‘모든 것들은 다만 이 세상이 궁금해서 왔다가 또한 저 세상이 궁금해서 가는 것’이긴 하지만, 실은 제 뒤통수 한번 제대로 못보고 가는 삶임을 어쩌랴.

 

 

ACT4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메모 : 제4막님이 시하늘 '시 맛있게 읽기'에 올려주신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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