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집을 짓지 않는다

行雲300 2006. 2. 25. 22:15



애초에 책을 거실에 내 놓은 것이 잘못이었다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고
연필로 줄만 쳐도 바스러질 정도로
책은 낙엽처럼 시들어 버렸다
등표지도 제목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바랬다

햇볕이 문제였다
이사 오기 전 살던 반 지하 단칸방에선
책이 습기로 썩어서 문제이더니
형편이 펴서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볕 잘 드는 거실에 진열해 놓고 나서는
아끼던 책들이 아주 못 쓰게 되고 말았다
책은 햇볕에선 살 수 없는 음지식물 같은 걸까
내 젊은 날의 순수와 열정이 담겨 있는 책들
책 뒤에 '86년 6월 종로 서적'이라고 적힌 걸 보니
벌써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구나
그 동안 내 모습도 빛 바랜 책처럼 변해 버렸을까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더 이상 책이 망가지기 전에 책을 옮겨야겠다
햇볕 들지 않는 작은 방으로 책장을 다 옮겨야겠다


2002.10.26 行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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