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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 확률적으로 따져 봐도

行雲300 2021. 5. 17. 05:03
어처구니, 확률적으로 따져 봐도


어처구니나 어이가 맷돌 손잡이라느니 궁궐의 잡상이라는 얼토당토않은 가짜 정보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이 가짜 정보를 아무런 점검 없이 받아적은 영화 [베테랑]과 수종의 창작 동화, 일부 초등학생용 학습 백과사전, 신문 방송 등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일단 문헌적 근거를 대략 살펴 보아도 어처구니나 어이가 맷돌의 손잡이나 궁궐의 잡상이 아니라는 점은 명명백백하다. 거의 모든 정통 국어 사전이나 관련 백과사전에는 어처구니나 어이를 맷돌 손잡이나 궁궐의 잡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이라고 풀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맷돌 손잡이에 대해서는 '맷손'이라는 단어가 엄연히 등재되어 있고, 궁궐의 잡상 역시 '잡상'이라는 단어로 등재되어 있다. 이상의 문헌적 근거만으로도 어처구니나 어이는 맷돌 손잡이나 궁궐의 잡상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도 자명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헌적 근거를 모른다 하더라도 어처구니나 어이가 맷돌 손잡이나 궁궐 손잡이가 될 수 없음을 '확률적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1. 언어학의 일반 상식으로 따져본 확률 계산
인터넷에 떠도는 가짜 주장은 크게 세 가지다.
(가) 맷돌의 손잡이가 어처구니다.
(나) 궁궐의 잡상이 어처구니다.
(다) 맷돌의 손잡이가 어이다.

만약 (가)가 맞다면 (나)나 (다)는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나 (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첫째, 유의어나 동의어의 경우, '삶-인생-라이프'처럼 서로 다른 계열에서 하나씩 (즉 고유어나 한자어, 외래어 계열로) 존재하는 것이 언어학의 일반적 사실이고 상식이지, (가)어처구니나 (다)어이처럼 같은 고유어끼리 유의어나 동의어로 존재하는 일은 거의 없다. 같은 뜻의 단어가 한 계열에 두 개씩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한 단어가 여러 가지 뜻을 가지는 다의어의 경우 그 여러 가지 뜻은 의미상 서로 관련이 있게 마련인데, 그렇다면 (가)와 (나)처럼 한 단어가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를 가지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가)와 (나)는 동시에 성립되기 어렵고, 그렇다고 그 둘이 동음이의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도 없다.

그렇다면 위의 각 주장들은 하나가 맞다면 둘은 틀리다는 것이니, 그 셋은 진리일 확률이 각각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어처구니에 대해서는 맷돌의 중쇠라느니 '어디에 몸을 두어야 할지 모른다'는 뜻의 한자성어라느니, 더 많은 설들까지 넣으면 그 확률은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단순히 상식적으로만 따져도 위의 주장들은 거짓일 확률이 매우 높으며, 문헌적 근거까지 확인하면 위의 세 가지 주장이 성립할 확률은 각각 거의 영에 가까운 것이다.

2. [표준국어대사전]과 초등용 학습사전
ㅡ각종 사전의 설명을 비교해 본 확률 계산
어떤 인터넷 기사에서는 어처구니가 맷돌 손잡이라며 그 근거로 C출판사에서 펴낸 초등용 학습백과사전을 들고 있다. 또 어떤 글은 네이버의 오픈 사전을 들고 있다. 그렇다면 맷돌 손잡이가 맷손이라고 풀이된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과 C출판사의 초등용 학습 백과사전, 어떤 사전을 믿는 것이 옳은가? 궁궐의 잡상을 잡상이라고 한 [민족문화대백과 사전]과 비전문가인 네티즌이 잡상을 어처구니라고 올려놓은 오픈 사전, 어떤 말을 믿어야 할까?

그래도 못 믿겠거든 각종 국어사전과 관련 백과사전, 건축 용어사전을 최대한 확인해 보면 된다. (요즘은 좋은 사전들이 인터넷에 많이 올라와 있어서 굳이 큰 도서관에 가지 않아도 핸드폰만 있으면 바로 확인된다.)그래서 맷돌손잡이를 맷손이라고 풀이한 사전과 어이나 어처구니라고 한 사전이 몇 개씩이나 되는지 숫자로만 비교해 봐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궁궐의 잡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본인이 확인해 본 바로는 사전의 100중 99는 맷돌 손잡이는 맷손, 궁궐 잡상은 잡상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이를 어이니 어처구니니 하고 풀이한 곳은 위에서 말한 오픈 사전이나 초등용 학습 백과사전 등 서너 개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맷돌 손잡이나 궁궐의 잡상을 어이나 어처구니라고 풀이하는 주장이 진리일 확률은 거의 영에 가깝다. 하물며 그 문헌적 근거 제시 여부를 따진다면, 그 확률은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다.

3. 심리적 경향으로 따져본 확률 계산
다음의 두 가지 주장을 보자.
(가) 1. 맷돌 손잡이는 맷손이다.
2. 궁궐의 잡상은 잡상이다.
(나) 1. 맷돌 손잡이는 어처구니(어이)다. 그런데 이게 없어서 어처구니(어이)없다는 말이 생겼다.
2. 궁궐 잡상이 어처구니다. 그런데 궁궐 지붕에 잡상을 올리지 않아서 어처구니없다는 말이 생겼다.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더 재미있는가? 누구라도 (나)를 재미있다고 하지, (가)를 재미있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비록 가짜지만) 그 나름의 논리 구조와 스토리를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궁금히 여기는 '어처구니(어이)없다'의 어원에 대해 알려주어 듣는 사람에겐 지적 만족감을 채워 주고, 말하는 이에게는 자긍심을 갖게 해 주는 묘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슨 도를 전하는 사람처럼 '어처구니를 아십니까?' 하며 퍼나르게 되는 것이며, 어린이 여러분 맷돌 손잡이를 뭐라고 하는지 아나요? 하며 책을 팔아먹는 것이다. 팔아먹는 사람은 이익이라도 챙겼지만 비싼 돈 내고 그런 책을 산 사람들이 마치 큰 은혜라도 받은 것처럼 감지덕지하는 것은 참 답답한 노릇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를 퍼나르지는 않는다. 일단 재미가 없고, 그 내용이 이미 사전에 다 나와 있으니 굳이 이를 퍼나르는 수고를 본인이 수고비도 안 받고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그런 내용이 일단 사전에 없다. 실지로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없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사전도 모르고 있는 굉장한 것을 자기가 알게 된 것으로 착각하여 마치 신비한 계시를 받은 신흥 종교 신자처럼 더 열심히, 아주 자발적으로 퍼나르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책도 많이 팔리지, 시청률은 오르지, 관객은 더 늘지 하니 얼마나 재미가 쏟아지겠는가? 만약 그들 중 누구라도 조금만 수고를 더 해서 사전에 맷손이나 잡상이라는 단어가 버젓이 있다는 것만 확인했어도 이런 엉터리 가짜 정보를 퍼나르는 일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이것은 비단 어이나 어처구니만의 문제가 아니다. 묘하게도 이 세상은 가짜가 진짜보다 더 재미있게 되어 있고, 사람들을 솔깃하게 만들고 심지어 감동시키며, 또 사람들은 가짜가 진짜를 이길 때 묘한 쾌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가짜 뉴스가 더 사람들을 솔깃하게 하고, 가짜 유투브들이 더 많은 돈을 벌고, 멀쩡한 사람들이 신흥 종교에 혹하게 되는 것이며, 포퓰리즘이 더 많은 표를 얻는 것이다. 현금의 어이나 어처구니 문제는 그런 면에서 일종의 신흥 종교 현상과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가짜임이 분명함에도 사람들은 확인도 해 보지 않고 이 매력 있는 가짜인 (나)를 퍼나를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버섯일수록 그 색이 화려한 것이고 나방은 밝은 등불 때문에 죽는 것이다.


4. 정수기가 필요한 시대
현대를 가리켜 정보의 홍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옛날 어른들의 말씀처럼 홍수에는 마실 물이 없는 법이다. 물이 많다고 이게 웬 물이냐 허겁지겁 들이켜기 전에, 먹어도 되는 물인지부터 확인하는 분별력을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현대를 슬기롭게 살아가는 교양인, 문화인의 자세일 것이다.

물을 오염시키기는 쉽지만 다시 맑게 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 가짜 정보를 누군가는, 그리고 언젠가는 바로잡아야 한다. 이 더러워진 가짜 정보를 자라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먹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어지러운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물통이 아니라 정수기가 아닐까. 모름지기 말과 글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지식인들이나 작가, 기자들, 교양인들은 물론 아이들을 기르는 젊은 부모들은 성능이 좋은 정수기 하나씩은 구비하고 있어야 하는 그런 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