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하늘 시편지

[문인수] 송산서원에서 묻다

行雲300 2008. 7. 14. 21:57
    송산서원에서 묻다 / 문인수 마을 뒤, 산 밑에 오래 버려진 송산서원에서 나는 폐허에게 묻는다. 이쯤에서 그만 풀썩 무너지고 싶을까. 이것저것 깨묻는다. 찔레 덤불이 겹겹 앞을 가로막으며 못 들어가게 한다. 돌아서고 싶을까. 찔레 가시에 찔리며 긁히며 억지로 들 어선 마당, 그리고 뒤꼍. 풀대들, 풀떼며 잡목들이 아주 불학무식하다. 공부하 고 싶을까. 작은 마루에 방 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 을까. 기둥과 기둥 사이에 줄을 쳐, 토종 강냉이 수십 다발을 주렁주렁 널어두었다. 산새 부리들, 들쥐 다람쥐 청설 모… 잇자국들이 대를 이어 상세하다. 이 빠진 세월은 또 얼마나 길까. 누군가 버리고 간 한 무더기 세로쓰기 책 들, 대강 넘겨보니 사법고시 준비를 한 것 같다. 그리고 취사도구 몇, 잘살까. 거미줄이며 먼지가 이렇게 힘세다. 작파했을까. 이 방 저 방 마구 부서져 널려 있는 것들 중에 격자무늬 문짝 몇개가 그나마 그래도 쓸 만하다. 사방, 닫아걸고 싶을까. 마당을 다시 잘 살펴보니 풀숲에 작은 웅덩이 흔적이 두 군데, 이쪽저쪽 숨어 있다. 썩은 꺾꽂이 같은 세월, 깜 깜 눈 감고 싶을까. 나는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과거지사란 남몰래 버티는 것, 대답하지 않는다.
    *****************************************************    
       이른 아침, 시골 텃밭에 가서 
       호박 덩굴에게 묻는다.
       어딜 그리 꼭 가야 할 곳이 있느냐고.
       굳이, 담장으로 올라가라고 만든 나뭇가지를 등지고
       열무 잎 위에 척 걸쳐있는 마음은 무어냐고.
       푸른 뱀처럼 쳐든 덩굴손, 내가 무섭다고 하니
       남편이 뽑아 버릴까? 나도 무섭거든, 
       꿈에 나타날 것 같아 한다.  
       한 낮에 다시 가 보니 풀썩 주저앉은 덩굴손, 
       뜨거운 햇볕에 깜깜 눈 감고 싶을까. 
    
       앞으로 주렁주렁 자식들 거닐고 살아가야 하는데,
       살아간다는 것은 홀로 버티는 것, 
       기운 내라.
       *사진:송산서원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창림리 소재
       詩하늘 드림  詩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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