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집을 짓지 않는다

정주(定州)

行雲300 2006. 2. 25. 22:33
정주(定州)


소나무들도 파랗게 얼어 서 있는
공원 묘지 한쪽 구석
아버지의 비석을 닦다가
흐려진 눈에 성큼 들어온 음각자(陰刻字)
평안북도 정주
고집스럽게도 달고 계셨구나
돌아가신 지 어언 40년
이국 땅에 외톨이로 걸린 한글 문패처럼
쓸쓸히 닳아져 가는 아버지의 고향
낯선 피난지 부산에
청상의 아내와 4남매를 남기고
유산 한 푼 없이 돌아가신 아버지가
장성한 아들에게 머뭇머뭇 들려주시는
말없는 유언을 듣는다
두고 온 고향을 죽어서인들 잊으리
가보지도 못한 아버지의 고향이
도려내는 듯 내 가슴에 사무쳐 온다
평안북도 정주
나 태어난 고향보다 더 오랜 고향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대대로 지켜오신 삶의 터전
아버지의 비석을 닦으며
내 기나긴 그리움의 정처를 알 것 같았다
언젠가는 아버지와 함께 찾아가야 할
아아 머나먼 고향 정주
햇살이 눈에 시린 설날 아침
아버지의 비석을 닦으며
나도 가슴에 비석 하나 새기고 있었다



2003. 2. 2 行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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