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하늘 시편지

[이형기] 항복에 대하여

行雲300 2006. 2. 26. 23:56
    항복에 대하여 / 이형기 항복한 자는 두 손을 번쩍 위로 치켜든다. 그리하여 뜻밖에도 하늘을 저 혼자 차지해버린다. 손은 완전히 비어 있다. 들었던 것도 내버리지 않으면 항복할 수가 없다. 막바지에 몰려 벌거벗고 나선 겨울 들판의 앙상한 나무 한 그루. 실은 행복에서 내리긋는 한 줄만 덜어내면 항복이다. 겨우 한 줄만 덜어내도 행복처럼 기를 쓰고 지킬 필요가 없는 항복의 축복. 하늘에 새 한 마리 날고 있다. 벌거벗은 겨울나무가 새가 되어 한 줄 덜어낸 항복의 그 가벼움을 날고 있다. 아니다. 퇴로가 차단된 막바지 추락의 꿈이 하늘을 다 차지한 새 한 마리 두 손을 치켜들고 그렇게 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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