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기행문, 기타

행복에 대하여

行雲300 2020. 12. 14. 17:11
행복에 대하여/ 강승남


행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당신은 지금 행복하느냐 하는 질문도 심심찮게 받는다. 그때마다 대답하기가 난감하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이런 저런 대답을 해 보아도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하고 상대방도 그리 탐탁해 하지 않는 것 같다.
 
부귀영화가 행복일까? 자기 일에 만족하고 열심히 보람을 느끼며 사는 것이 행복일까? 가족이 화목하고 무탈하고 건강한 것이 행복일까? 남보다 더 빨리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는 것이 행복일까? 취미 생활이나 자기 계발에 깊이 몰입하여 사는 것이 행복일까? 아니면 세상과 떨어져 종교적으로 깊은 믿음과 평안을 누리는 것이 행복일까?
 
사람들마다 대답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어떤 대답을 하든 그 반대인 사람은 불행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예를 들어 부귀영화가 행복이라면, 자기 일에 만족하고 보람을 느끼는 사람도 돈이 없으면 불행한 것이다. 가족이 건강하고 무탈한 사람도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불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을 섣불리 정의하는 순간 그에 해당하지 않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불행해지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이어야 할까? 사람마다 다른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어서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행복은 일률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며 또 행복의 정의를 내린들 모든 사람이 수긍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정의할 수 없는 걸까? 본인이나 다른 사람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말할 수 있는 기준이란 없는 것일까? 행복이 정의될 수 없다면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행복이란 '불행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 행복을 좁다랗게 규정하기보다는 불행의 반대 개념으로 널따랗게 생각하면, 많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 비유하자면 죽음이 아니면 아프든지, 가난하든지 어쨌든 삶이듯이, 극단적인 불행이 아니면 다 행복이 아니겠느냐는 생각.
 
비록 부자가 아니어도 굶어죽을 정도의 극빈이 아니라면, 건강하지 못해도 지금 당장 자리 보전하고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정도가 아니어서 내 밥 내가 벌어먹고 살 수 있다면, 가족이 화목하고 건강하지 못해 다투기도 하고 갈등이 있어도 내 곁에 가족이 있어주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 아닐까?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행복하냐고 물을 때 내가 극단적으로 불행하지 않다면 '행복합니다.' 라고 답해도 되지 않을까?

성경에는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디모데전서6:8)라고 하였고, 노자도 '만족을 아는 자가 부자(지족자부)'라고 하였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극단적, 절대적 불행의 상황이 아닐진대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것이 행복일 것이다. 혹시 일시적으로 먹을 것, 입을 것마저 걱정해야 할 상황이 오더라도, 이를 견뎌내며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면, 비바람이 언젠가는 그치고 맑은 날이 오듯 행복은 반드시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정말로 다시 회복될 수 없을 때에는 겸손히 이를 받아들이며 지나온 삶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다. 올해의 첫눈이다. 창밖에 서 있는 나무의 마른 가지 위로, 아직 떨어지지 않은 마른 잎새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있다.  눈은 푸른 나무, 어여쁜 꽃이 아닌 헐벗은 나무, 마른 잎새 위로 내리는 것이다. 그것은 겨울나무의 행복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며, 내게도 스스로 물어본다. 너는 지금 행복한가? 내 메마른 가슴 위로 가만히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