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에서 도를 닦다
태안에서 도를 닦다/ 강승남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했습니다. 날씨도 겨울답지 않게 포근해서 멀리 수평선은 가물가물 꿈을 꾸는 듯 했습니다. 이렇게 평화로운 바닷가가 오늘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댑니다. 사상 최악의 원유 유출 사고로 참담하게 오염된 바다를 살리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몰려온 것이지요.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바닷가, 이곳이 오늘 우리 교회(삼락교회)가 자원봉사차 찾아온 곳입니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날씨가 무척 추웠다는데, 오늘은 그나마 날씨가 춥지 않은 게 다행스럽기도 하지만 미안하기도 합니다.
처음 차에서 내렸을 때는 대형 버스에서 뿜어내는 것 같은 역한 기름 냄새가 확 풍기어 왔습니다. 안내해 주시는 분들을 따라 바닷가로 나가자 아직도 해안의 갯바위와 자갈들이 시커먼 기름을 뒤집어 쓴 채로 돌림병 환자들처럼 힘없이 누워 있었습니다. 한 달 동안의 기름 방제 작업으로 어느 정도 응급 방제는 되었다고 들었는데, 막상 현장에 와서 실상을 보니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아 보였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상태가 심각했고 참담했습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분노가 일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이 아름다운 자연에 누가 이런 일을......
<의항리 바닷가에서 기름 제거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
언론에서는 우리 해운 사상 최악의 원유 유출 사고라고 했습니다. 원유가 무려 일만 오천 톤이나 유출되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정작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원유 유출의 규모가 최악이라는 것보다 사고가 일어난 과정이 최악이라는 점일 것입니다. 대형 유조선과 크레인 예인선이 그 넓은 바다에서 엄청난 충돌을 일으키기까지 서로가 멀쩡하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고, 위험을 감지한 항만 당국의 교신에 유조선이나 크레인 예인선이 모두 응답하지 않았다는 것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사고 당일 기상이 나쁜 상황에서도 크레인을 실은 예인선이 운항을 강행했다는 것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1989년 미국의 엑손 발데즈호 원유 유출 참사 이후 맺어진 국제 협약에 따라 이중 선체가 아닌 유조선은 2010년부터는 항해를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데도, 국내 굴지의 정유업체가 아직까지 단일 선체인 허베이 스피리트호로 원유를 수송했다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사고 후 당국의 안일한 대응으로 태안의 주민들이 아무런 조치도 없이 고스란히 피해를 당한 과정도 역시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와중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 모든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마치 누군가가 계획이나 한 것처럼 한 날 한 시 한 장소에서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모든 어처구니없는 일들에 대해 사과 한 마디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어처구니없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거대 기업과 당국의 안전 불감증, 무책임성이 총체적, 복합적으로 드러난 부끄러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비 절감이니 일정 단축이니 하며 자신들의 이익 챙기기에는 급급해 하면서도 안전이나 환경, 사회 전체에 미칠 영향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이기적인 기업 태도 때문에 애꿎은 어민들이 고스란히 기름을 뒤집어 쓴 채 신음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급한 것은 오염된 돌부터 닦는 일, 분노와 슬픔을 속으로 삭이며 배정받은 자리에 앉아 시커멓게 기름에 찌든 돌들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헌 옷가지 같은 것으로 그 수많은 돌 하나하나를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닦아야 하는 참으로 원시적인 작업입니다. 닦아도 닦아도 돌들은 쉽사리 깨끗해지지는 않습니다. 바닷가의 돌들이란 게 벽돌처럼 반듯반듯하거나 조약돌처럼 반들반들한 것들보다는 대부분이 울퉁불퉁 못생긴 것들이어서 더욱 닦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조약돌처럼 작은 것들은 조금 낫지만 크기가 사람 머리만한 것들은 들고 닦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하물며 바위들은 들고 닦을 수도 없으니 사람이 따개비처럼 들어붙어서 구석구석 닦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루 종일 닦아야 자기 앉은 자리 주변도 다 닦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이 넓은 해안의 수많은 바위와 자갈, 모래까지 어느 세월에 다 닦아낼 수 있을까요? 게다가 바닷가의 돌들은 한 층으로만 깔려 있는 것이 아니고 돌 아래 또 돌이 있고 그 아래 또 있고 그 아래는 또 다시 모래들이 기름에 절어 있으니 말입니다.
몇 년 전 세계적인 오일 쇼크로 우리 경제가 어려웠을 때 우리는 원유 생산국을 무척이나 부러워했습니다. 원유를 '검은 황금'이라 부르며 거의 숭배하기까지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바다 곳곳에서는 그 귀한 원유를 찾아내기 위해 탐사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숭배해 마지않던 바로 그 '검은 황금'이 지금 우리의 바다를 덮쳐서 어민들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바다만 있으면 그저 그날그날 먹고는 살 수 있었던 순박한 어민들이 바다 저 멀리서 몰려온 '검은 황금' 때문에 시커먼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와서 기름에 찌든 돌들을 닦아 준다고 정작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어민들의 피눈물이 얼마쯤이나 닦아질까요?
이렇듯이 우리 어민들의 순박한 삶이 파괴된 데는, 조금이라도 경비를 더 절감해서 더 많은 황금을 벌어들이려는 거대 기업들의 욕심, 자신들의 이익에만 눈이 멀어 환경이나 사회에 미칠 피해는 뒷전인 그들의 무책임한 태도에 일차적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이기적인 거대 기업의 검은 욕심, 그것이 바로 오늘 태안을 오염시킨 검은 원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이기적 욕심, 황금 숭배의 태도는 거대 기업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황금' 그 자체에 대한 욕심으로 세상을 더럽히고 있는 것은 우리들 모두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속물적 자본주의와 황금만능주의에 물들어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인정과 미풍양속을 오염시키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원유로 시커멓게 뒤덮인 태안 반도의 모습과 무엇이 그리 다르겠습니까? 황금이 없어도 고기 잡아 먹고 농사 지어 먹으며 어여쁘고 정답게 살아가던 국태민안의 땅, 태안의 조약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황금에 눈이 멀어 시커먼 욕심으로 속속들이 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디모데전서 6장 10절)라고 하였나 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닦아야 할 것은 기름에 찌든 돌들과 수많은 어민들의 눈물뿐만이 아니라 황금만능주의에 찌든 우리 모두의 검은 마음부터 닦아내어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거대 기업이나 잘못된 세상을 탓하기 전에 우리 기독교인들부터가 반성을 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사는 것은 부끄러워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던 우리들의 마음이 교회와 세상을 시커멓게 오염시키고 있지나 않은지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돌을 닦노라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이 이렇듯 원유찌꺼기보다도 더 검을진대 감히 우리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검은 욕심에 찌든 우리 마음부터 제대로 닦아야겠습니다. 돌을 닦는 일은 이제 나의 마음을 닦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돌 닦는 일도 조금 엄숙해집니다. 역하기만 하던 기름 냄새도 익숙해지고, 분노와 슬픔으로 무겁던 마음도 오히려 조금 개운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돌을 닦다 보니 어느 순간 돌들이 말을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휴 이제 살았다. 고마워요.' 그러기도 하고 '거기 좀 더 세게 닦아줘요.' 그렇게 주문하기도 하고 어떤 늙으신 돌들은 '젊은이 고마우이. 복 받을껴.' 그러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도 '힘 내세요. 저희가 열심히 도와 드릴게요.' 하고 더 열심히 닦아드립니다. 그렇게 돌과 대화하면서 닦다 보니 제겐 어떤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회복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잠시 기름을 뒤집어쓰고 힘들어하고 있지만 이들은 오랜 시간동안 바다와 함께 꿋꿋이 살아온 단단한 차돌들이고 바위들입니다. 바위나 차돌은 검은 기름에 잠시 더러워질 수는 있어도 깨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한 마음으로 닦고 또 닦아낸다면 다시 아름다웠던 바닷가의 바위와 차돌들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물론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말입니다.
<점심 시간에 같은 교회 집사님과 함께>
아닌게 아니라 우리 민족이 누굽니까? 역사적으로 900회가 넘은 외침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온 은근과 끈기의 민족 아닙니까? 그 동안 이번의 원유 유출 사고 같은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유구한 역사 속에서 그 숱한 시련과 고난을 모두 이겨낸 민족입니다. 그리고 시련과 고난을 통해 차돌보다 강해진 우리들입니다. 틀림없이 이번의 시련도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으로 단결하여 충분히 이겨낼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한 우리들의 반성도 있어야 할 줄 압니다. 순박하고 아름다웠던 우리 민족성을 더럽혔던 모든 더럽고 검은 것들- 총체적인 안전 불감증과 무책임, 황금만능주의와 이기적 욕심, 이러한 것들을 이번 기회에 철저히 닦아내어야 할 것입니다. 단지 바위와 모래만 닦아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살던 물고기들과 조개들, 해조류까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의 시련을 단순히 이겨내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전보다 더 깨끗하고 아름다운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원봉사랍시고 와서 내 주위 한 평도 못 닦았는데 어느 덧 날이 저물어 작업을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아직 손도 대지 못한 돌들이 더 많습니다. 돌들이 여기저기서 빨리 돌아와 와 달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뉴스에서는 40만이니 50만이니 하며 엄청난 자원봉사자들이 온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내 생각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0만, 50만이 아니라 400만, 500만이 와야 할 것입니다. 특히 방학을 맞은 대학생들이나 입시가 끝난 수험생들은 모두 한 번씩은 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학생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공부일 것입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 도로변에 걸려 있는 현수막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국민 여러분, 제발 살려 주십시오.”
태안의 못생긴 돌들이 검은 피눈물로 쓴 현수막이었습니다.
2008. 1. 5. 行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