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감상

[손남주] 청도에서

行雲300 2006. 3. 12. 01:32

청도에서/ 손남주


쟁기도 달구지도 없었다
송두리째 박제된 황소가
코뚜레도 고삐도 다 내어주고
물도 없는 냇바닥에서
두 뿔만 엉크렇게 싸움소로 마주 섰다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어라,
네 형제의 심장을 쏘아라!

거꾸로 서는 피,
과녁을 노리는 핏발 선 두 눈,
우직한 뿔이 허공으로 돌진했다
쾅,
가슴이 무너지고
피가 흥건했다
돌아보니 아, 그것은
내 가슴이었다

일제히 일어서는 환호성 뒤에서
알몸의 황소가 산같이 울었다

나는 조용히 고삐를 풀고
푸른 초원으로 황소를 데리고 갔다

 

 

 

손남주 시집  '날개, 파란 금을 긋다' (현대시 2005)